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아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아버지의 사랑에 순명하신 주님.
저희는 “날마다 스스로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주님의 명에 따라 이곳에 어려 있는
한국 첫 순교 복자들의 얼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고자 하오니,
지상생활에서 주님의 복되신 수난에 동참할
힘을 주시어 죄와 죽음의 고통에서 승리하신
주님의 모습을 뵙는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또한 이곳 성지를 후원한 이들의 정성을
받아들이시어 십자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때 모두가 함께
기뻐 용약하게 하소서.
◎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
예수 그리스도님,
(깊은 절을 하며)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윤지충은 해남 윤씨의 유명한 양반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의 조상들은 왕국의 고관들 가운데서도 대개 두각을
나타내는 자리를 차지했고 그들 중 여럿은 학문에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아버지는 전라도 진산군 장구동에
정착했고, 윤지충은 1759년에 바로 그곳에서 태어났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한 윤지헌
프란치스코는 그의 아우이다.
25세가 되던 1783년 그가 과거시험에서 진사에 급제했고,
이 무렵 그는 고종 사촌 정약용 요한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천주교의
모든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으며, 순명의 참된 삶을 살았다.
이렇게 3년 동안 교리를 공부한 윤지충 바오로는 1787년
인척인 이승훈 베드로에게 정약전을 대부로 하고,
세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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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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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님,
(깊은 절을 하며)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이후 윤지충 바오로는 어머니와 아우 윤지헌 프란치스코,
외종 사촌 권상연 야고보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또, 인척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자주 왕래하면서
널리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A. Gouvea)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는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어머니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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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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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님,
(깊은 절을 하며)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제사 문제로 친척들과 이웃들의 비난이 쏟아졌고,
날이 갈수록 그 소리는 높아졌다. 친인척도 아니면서
고발에 발 벗고 나선 배교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홍낙안 이다. 그는 천주교를 배척하고 공격하는 세력의
선봉에 서서 신주를 불사른 윤지충과 권상연을 고발하는
장서(長書)를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올리는 한편,
진산 군수에게 사건의 전모를 수사하여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토록 부추겼다. 진산 군수는 윤지충의 집을 수색하여
안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신주 감실을 발견하고
윤지충 바오로 와 권상연 야고보를 체포하라는 명을 내렸다.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최초의 천주교 탄압의
시작이었다.
진산사건(珍山事件)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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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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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님,
(깊은 절을 하며)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윤지충 바오로는 군수로부터 체포령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길을 나서 군청에 자헌(自獻)하러 갔다.
진산 군수는 먼저 윤지충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권유하였다. “네가 이단에 빠져 방향을 잃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냐?”라는 군수의 물음에 “저는 결코
이단에 빠진 게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천주교를 따른다는
것은 사실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이런 대화는 윤지충 바오로가 남긴‘문초 기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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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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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님,
(깊은 절을 하며)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군수는 윤지충을 국법에 따라 다루라고 명했고,
윤지충 목에는 즉시 무거운 칼이 씌워졌다.
이틀 뒤 권상연도 끌려와 문초를 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교가 진리임을 역설하면서
‘절대로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여러 차례의 설득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자, 진산 군수는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는 산길을 넘어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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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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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님,
(깊은 절을 하며)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전주에 도착한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는
각자의 목에 무게가 18근 되는 칼이 씌워졌고,
그 위의 목에 쇠사슬을 매달고 나무 갈고리로 그들의
오른손을 칼 가장자리에 잡아매었고, 옥에 가두었다.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전라 감사는
그들로부터 천주교 신자들의 이름을 얻어내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전라 감사는 “어찌하여 이단에 빠져 네 신세를 망치려
하는 거냐?”라고 물었다. 윤지충은“천주는 대부(大父)시오.
하늘땅. 천사들과 사람들, 그리고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니,
그분을 섬기는 것을 이단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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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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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님,
(깊은 절을 하며)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문초가 계속되자 “윤지충은 중인 계급의 김범우 집에 가서 ‘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을 빌려와 그것을
베끼어 썼고, 즉시 책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 이후 국왕의 금령 소식을 듣고, 중국 종이에 있던 것은
태웠고, 옛날 종이에 있던 것은 씻어 없앴으므로
집에 존재하지 않은 지 여러 해 되었다”고 진술했다.
또한, ‘너는 정말로 신주들을 불태웠느냐?’라는 질문에
‘만일 제가 부모님이 신주 안에 계시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불태웠다면 형벌은 마땅할 것이나, 거기에는 제 부모의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알고 하였으니
무슨 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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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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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님,
(깊은 절을 하며)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전라 감사는 형리에게 매를 치라고 명령했다.
그런 다음 감사는 다시 묻기를 “네가 죽게 되어도 그 종교를
버리지 않을 것이냐?”하였다.
“제가 그 크신 저의 아버지를 배반하고서 살아서건
죽어서건 제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윤지충은 또 다시 매를 맞았다.
이들은 사대부의 예법은 위반하였으나
조선의 국법을 어긴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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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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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님,
(깊은 절을 하며)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그들은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교회나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특히 윤지충은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제사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지적하였다.
이에 화가 난 전라 감사는 그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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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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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님,
(깊은 절을 하며)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전주 감사는 할 수 없이 그들로부터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내 조정은 다시 한 번
소란스러워졌고,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높게 되었다. 결국 임금은 이러한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들의 처형을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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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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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님,
(깊은 절을 하며)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 마디 없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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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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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님,
(깊은 절을 하며)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1791년 12월 8일, 신해박해(辛亥迫害)
때 참수(斬首) 되었으며 사형 판결문이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는 즉시 윤지충과 권상연을 옥에서 끌어내 전주 남문
밖으로 끌고 갔다. 이때 윤지충과 권상연은 마치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표정을 하였으며,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교리를 설명하였다.
그런 다음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그때가 1791년 12월 8일 오후 3시였다.
당시 윤지충의 나이는 33세였고, 권상연은 41세였다.
윤지충의 아우인 윤지헌 프란치스코는 1801년 10월 24일에
능지처참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고산에 갇혀 있던 아내와
가족들은 모두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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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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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님,
(깊은 절을 하며)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친척들은 9일 만에 임금님으로부터
허락을 얻어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그들은 그 시신이 조금도 썩은 흔적이 없고,
형구에 묻은 피가 방금 전에 흘린 것처럼 선명한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랐다. 이후 교우들은 여러 장의 손수건을
순교자의 피에 적셨으며, 그중 몇 조각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거이 죽어가던 사람들이
피가 묻은 손수건을 만지고 나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두 순교자의 피는 교우들의 씨앗이 되었다고
당연히 말할 수 있다. 김대건 신부의 보고서 중에서
“이분이 바로 조선의 첫 번째 순교자입니다.
”(Hic est Protomartyr Coreae) - (1848. 3~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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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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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님,
(깊은 절을 하며)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시복식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윤지헌 프란치스코를 포함한 124위를 복자(福者)로
선포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24위의 순교자들을 앞으로 복자라고
부르고 법으로 정한 장소와 방식에 따라 해마다 5월 29일
축일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는 시복 선언을 했다.
한국의 첫 순교 복자들이여.
님들은 세상에서의 욕구와 삶을 ‘내려놓음’으로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여 순교하였으니,
저희도 현세에서 그 치명의 삶을 살아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이끌어주소서.
주님. 주님의 죽으심을 묵상하며 성체를 모시게 하소서.
(잠깐 묵상한다.)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