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보는 이도 자연의 경이로움에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축복임을 절로 감사드리게 된다.
한때는 이곳이 기득권자들의 열등감과 우월의식 때문에
황폐한 사막으로 변해버렸다.
그것이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긴 것처럼 보이고,
사라진 것처럼 여겨지나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어언 200여년이 지나버렸고,
묻혀 있는 보물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살아있고 언젠가는 드러난다.
들을 줄 아는 이에게는 들리고,
볼 줄 아는 이에게는 보인다.
묻혀 있기엔 너무 엄청난 진실이기에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으로 마침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누구는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한다.
또 누구는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한다.
또 누구는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한다.
또 누구는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삶이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더 나아가 나는 누구인지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200여년 전 이곳
진산에서 두 어른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는 신앙의 신비를 온몸으로 살아내셨다.
그분들의 영혼의 외침은 오늘도
변함없이 천둥번개로 우리를 깨우고 있다.
그 소리를 알아듣는 사람들은 자기만의 길을 간다.
체면도, 형식도, 종교가 주는 죄의식도, 세상이 주는 열등의식, 우월감도 구애받지 않고 겉으로는
초라해 보일지라도 당당하게 자기 길을 간다.
그들은 자기 내면에서 사랑의 샘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예컨대, 성모님이 가브리엘 천사가 와서
처녀가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고 했을 때
그녀는 받아들였다.
그 성모님의 믿음이 바로
부활을 믿는 분들의 믿음이어야 한다.
반대로 베드로는 머리로 계산, 가능한 것만 받아들인다.
이것은 가짜 믿음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자신 있다고 생각되던 일들도
벽에 부딪힐 때가 있는 법이다.
요리 전문가도 어떤 때에는
음식 맛이 제대로 나지 않을 때가 있는 법이며,
아동교육 박사라 할지라도
자기 자식 교육에서는 실패할 수가 있다.
무엇인가 잘나가던 일들이 벽에 부딪혀 풀리지 않을 때,
세상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믿음의 문을 열고
들으라는 가르침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이다.
노예로 살아가면 갈수록 답답하다.
‘나는 자연인이다’ 의 프로를 보면
모두 사회생활과 직업에 지친 사람들이다.
자유를 방해하는 모든 것이 집착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집착은 욕심 때문이다.
욕심은 단지 마음의 바람이라는 것을 알아채야 한다.
이때부터 자유가 시작된다.
자유인은 자신의 삶은 물론
남의 삶도 그대로 수용한다.
수용해야 지켜보게 된다.
집안 꼴이 말이 아니다. 나는 어떤가.
몸과 마음이 주인이 되어선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당연히 내 꼴이 말이 아니다.
나의 주인은 의식이다.
몸과 마음이 의식을 섬겨야 한다.
지도자가 이를 모르고 무시하고 날뛰면 어찌 되나.
국가 꼴이 말이 아니다.
어찌 국가뿐이겠는가. 교회도 그렇다.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신자들이다.
그래서 예수도 섬기러 왔다고 하잖는가?
가정은 어떤가.
가족 구성원들끼리 서로 존중하지 않으면 가정은 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