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천주교의 전래
<곤여전도>
17세기에 이르러 조선시대의 유일한 이념이었던 유교의 지위가 약화되자
지식인들은 유교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으로 ‘서학(西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기하원본>등의 과학서를 비롯하여 <곤여만국전도>,
<직방외기>와 같은 세계지도와 지리서 등 서학서가 꾸준히 유입되면서
조선 지식인들의 시야는 청나라를 넘어 세계로 향하는 결과를 낳았다.
천주교도 이때 서학의 하나로 조선에 소개되었다.
<천주실의>, <칠극>, <교우론>, <성경직해> 등 60여 종의 천주교 교리서가
유입되어 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명례방에서의 초기 종교집회도>
서학서를 통해 천주교의 존재를 인식한 조선 지식인들의 천주교에 대한
관심은 점차 커져갔다. 특히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익의 제자 권철신과
더불어 정약전, 정약용,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이벽 등 진보적인
유학자들은 자체적인 강학을 열어 천주교리서를 검토하는 등 천주교는
점차 조선 사회 깊숙이 자리 잡았다. 이후 강학에 열성적이었던 이벽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이승훈 베드로가 북경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세례를 받고 천주교의 기도문과 서적을 얻어오도록 당부했다. 북경을
방문한 이승훈은 1784년 1월 말경,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Grammont)
신부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 천주교회의 첫 세례자가 되었다.
이후 이벽과 이승훈은 천주교를 더 이상 서양의 학문이 아니라 새로운
종교로 받아들일 것을 사람들에게 권했으며, 이들의 노력으로 점차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1784년
9월, 이벽과 권신일이 수표교 인근 이벽의 집에 모여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조선 최초의 천주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이로서 조선은 서양
선교사의 선교활동이 아닌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자체적인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는 세계 천주교회사의 유일무이한 역사를 이루었다.
<천주실의>
<칠극>
전라도 지역에서 최초로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이는
윤지충 바오로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이다. 이종사촌지간인 두 사람은
1784년 처음으로 천주교를 접하였다. 그해 윤지충으로부터 천주교를
소개받은 유항검은 1784년 겨울에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아 전라도의
첫 신자가 되었다. 윤지충은 정약전으로부터 천주교를 소개받아
<천주실의>, <칠극>을 3년 동안 깊이 탐구하였고, 정약전을 대부로 삼아
1787년 이승훈 베드로 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후 전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도 남쪽 지방은 유항검에 의해, 진산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북부
지역은 윤지충에 의해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02
진상성지의 인물
1759년
해남 윤씨인 아버지 윤경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서 출생
1783년
25세에 생원진사시 합격
1784년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실의>와 <칠극>을 접하고, 고종사촌인 정약용 형제의 가르침으로 천주교 입교
1787년
정약전을 대부로 모시고,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음
1790년
북경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금지령을 내림
1791년
윤지충이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폐제분주(廢祭焚主)’ 사건이 일어남 5월 어머니가 사망하자 8월에 천주교 예법으로 장례를 치름
1791년
(음)10월 26일((양)11월 21일) 진산관아에 자수
1791년
(음)10월 29일((양)11월 24일) 새벽에 전라감영으로 압송
1791년
(음)10월 30일((양)11월 25일) 전라관찰사 정민시에게 문초를 받음
1791년
(음)11월 13일((양)12월 8일) 신시(辛時) 전주 남문밖(전동성당 터)에서 참수형(33세)으로 순교-신해박해
1791년
처형된지 9일째 되는 날 매장이 허락됨
1792년
(음)10월 12월((양)11월 25일) 윤지충 시신을 전주군 초남이 바우배기에 안장
1795년
4월 유관검이 이존창과 함께 주문모 신부를 유관검의 고향집으로 맞아들임 마침 가는 길에 윤지충 · 권상연의 무덤가를 지나게 됨
2014년
양력 8월 16일 |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
1751년
안동 권씨 권세학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출생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내외종간(內外從間)-내외종(內外從)은 내종사촌과 외종사촌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내종사촌(고종사촌)은 아버지 여자 형제의 자녀를 말하고, 외종사촌(외사촌)은 어머니 남자 형제의 자녀를 일컬음
1787년
유항검에게 세례를 받음
1791년
(음)10월 26일 ((양)11월 21일) 진산관아에 자수
1791년
(음)10월 29일 ((양)11월 24일) 새벽에 전라감영으로 압송
1791년
(음)10월 30일 ((양)11월 25일) 전라관찰사 정민시에게 문초를 받음
1791년
(음)11월 13일 ((양)12월 8일) 신시(辛時) 전주 남문밖(전동성당 터)에서 참수형(41세)으로 순교-신해박해 처형된 지 9일째 되는 날 매장이 허락됨
1792년
(음)10월 12일 ((양)11월 25일) 권상연의 시신을 전주군 초남이 바우배기에 안장
2014년
양력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
1764년
아버지 해남 윤씨 윤경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서 출생
1789년
형 윤지충을 통해 천주교에 대해 알게 되고, 세례명 프란치스코로 세례를 받음
1791년
형 윤지충과 사촌 권상연의 순교 이후 고산 운동(완주군 운주면 저구리)로 이사
고산 저구리에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여 활동
1795년
봄 주문모 신부가 고산 저구리 이존창의 집에 잠시 머물며 이때 보례를 받고 성사 받음
1796년
전라도 공동체가 ‘대박청래운동’을 추진할 때, 유항검 형제의 부탁에 황심을 중국에 보낼 밀사로 추천하고 김유산을 밀사로 보냄
1801년
신유박해 때 전라감영에 체포됨
1801년
(음)3월 28일 전라감영에서 신문을 받음
1801년
(음)9월 11일 윤지헌은 의금부에서 심문받고, 모역동참죄(謀逆同參罪)로 사형 판결 받음-유항검과 함께 전주로 압송
1801년
(음)9월 17일((양)10월 24일)) 전주 남문밖(전동성당 터)에서 능지처참형으로 순교(38세)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의 나이는 우리 나이로는 38세이지만, 만으로 37세로 기록된 경우도 있음
윤지헌의 처 유종항은 전라도 나주목 흑산도에 노비로 유배
15세인 큰 아들 윤종건은 전라도 제주목에 관노로 유배
13세인 아들 윤종근은 경상도 거제부에 관노로 유배
4세인 셋째 아들 윤종득은 전라도 해남현에 관노로 유배
큰 딸 윤영일은 함경도 경흥부에 관비로 유배
둘째 딸 윤성애는 평안도 벽동의 관비로 유배
2014년
양력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
<권상연 가계도>
<복자 3인 친인척 관계도>
03
진산사건의 발생
천주교의 전래 이후 전국 각지에서는 자체적으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여
신앙생활을 이어가던 중, 1790년 북경 구베아 주교로부터 조선
천주교인들에게 제사 금지령이 내려졌다. 진산 지역의 윤지충과 권상연은
1791년 천주교도였던 윤지충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장례 때 유교식 장례를
거부하였다. 조선 조정은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여 배교를
강요하였으나,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두 사람을 참형에 처했는데 이를
‘진산사건’ 혹은 '신해박해’라 한다.
진산사건 이후 조선조정은 천주교를 유교질서를 위협하는 사교집단으로
규정하여 100여 년에 걸쳐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목숨을 잃게 되는
박해시대를 맞이한다.
“조선 교회에서 조상의 제사를 금지한다.” -1790년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
“내가 천주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은총을 입어
오늘까지 행복하게 사는 동안,
나는 그분을 위해
무엇 하나 제대로 한 일이 없었다.
부디 천주교 방식대로 그분께 가는 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구나.”
- 윤지충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
1790년 구베아 주교로부터 제사 금지령을 전달받은 윤지충과 권상연은
집안에 모시고 있던 조상의 신주를 불태웠다. 이듬해 1791년 윤지충의
어머니가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시자, 유교의 성직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교의 제사 의식대로
음식을 차리거나 신주를 모시지 않고 천주교식으로 정성껏 정중하게
상례를 갖추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친척들은 격분하였고, 이 소문은
비화되어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불효자로 고발되어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지배세력은 이 사건을 국가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그들의
처형과 천주교 탄압을 독촉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끊임없는 비판 속에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은 스스로 진산 관아를 찾아가 자수하였고, 전주
감영에 이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일이 알려지고 그들에 대한 처형과 천주교 배척을
요구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자 마침내 정조는 진산 군수 신사원에게 두
사람을 체포하라고 명했다. 몸을 피해 있던 윤지충과 권상연은 윤지충의
숙부가 감금됐다는 소식에 1791년 10월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당시 관아에서는 그들의 재주와 가문의 명예를 아까워하며 회유시키고자
하였으나 결연한 그들의 태도에는 끝내 변화가 없었다. 결국 진산 군수
신사원은 자신의 힘으로는 두 사람을 회유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들을
전주 전라 감영으로 이송하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라 감영에서의
문초와 형벌에도 당당하게 신앙을 고백하며 죽음을 맞이하였다.
진산 관아에서 전주 감영에 이르는 심문 과정과 진술 내용은 윤지충이
옥중에서 남긴 <공술기(供述記)>에 상세히 기록되어 전한다. 이는 한국
최초의 옥중 수기로 윤지충의 굳은 신앙심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산이다.
금수지교, 폐륜의 천주교 신자를 뿌리째 뽑아야 한다는 척사론자들의
주장으로 마침내 정조 임금이 윤지충과 권상연의 처형을 승인하였다. 그들은
참수형을 받아 1791년 신해년 음력 11월 12일(양력 12월 8일) 전주 감영
인근(현재 전동성당 터)에서 참수되었고, 그들의 머리는 9일간 효수되었다.
그때 윤지충은 33세, 권상연은 41세였다. 사형 언도를 받은 윤지충과
권상연은 평온한 모습으로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조선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정조 임금은 윤지충의 처형을 보고
“아뿔싸, 윤선도(고산)의 후손을 내 손으로 죽였구나” 하고 탄식하였다. 사형
언도를 후회하며 집행을 유예시키고자 급히 파발을 보냈지만 이미 사형이
집행된 뒤였다.
조선시대의 진산은 전라도에 속한 군(郡)이었으나 진산사건을 계기로
1791년부터 5년간 현(縣)으로 강등되었고, 진산 군수 신사원도 유배를
당하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제사 거부가 삼강오상(오륜)을 저버린
강상죄에 해당되기 때문에 지역 전체가 연좌의 벌을 받았다. 이후 진산에
살던 천주교 신자들은 산속에 숨어들어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는 등
신앙의 역사를 이어갔다.
1796년 다시 군으로 회복된 진산은 이후 그 지위를 유지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금산군에 병합되어 현재의 진산면이 되었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신유박해 순교자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 유해의 진정성에 관한 기록
<전주교구 pp 30-42 참조>)
<정조실록 33책 33권 56장>
(복본 : 어진박물관 제공)
윤지충과 권상연을 사형에 처하다.
(정조실록 33권, 15년 11월 8일 기묘 2번째 기사 1791년 청 건륭 56년)
대사간 신기가 시속의 네 가지 폐단을 아뢰고 천주학의 엄금을 칭하다.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0월 20일 신유 5번째 기사)
권상연 · 윤지충의 처벌을 청한 글과 홍낙안이 채제공에게 보낸 편지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0월 23일 갑자 1번째 기사)
좌의정 채제공이 양사의 이단을 배격하는 상소로 인해 차자를 올리다.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0월 24일 을축 1번째 기사)
좌의정 채제공과 더불어 천주학 문제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다.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0월 25일 병인 1번째 기사)
평택 현감 이승훈과 양근 사람 권일신을 잡아다 문초하다.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3일 갑술 2번째 기사)
전라도 관찰사가 죄인 윤지충과 권상연을 조사한 일을 아뢰다.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7일 무인 2번째 기사)
<순조실록 3책 3권 64장>
(복본 : 어진박물관 제공)
사학을 토죄하고 인정전에서 진하를 행하다.
(순조실록 3권, 1년 12월 22일 갑자 1번째 기사 1801년 청 가경 6년)
전라 감사 김달순이 도내의 사학 죄인 유항검·유관검·윤지헌 등의 나국을 건의하다.
(순조실록 2권, 순조 1년 4월 25일 신미 5번째 기사)
전라 감사 김달순의 보고에 관히 비국에서 아뢰다.
(순조실록 2권, 순조 1년 4월 26일 임신 4번째 기사)
사학 죄인 김유산에 대한 김달순의 장계.
(순조실록 3권, 순조 1년 5월 16일 신묘 3번째 기사)
추국을 설치하여 사학 죄인을 처리한 일에 대해 아뢰다.
(순조실록 3권, 순조 1년 10월 10일 계측 1번째 기사)
이만수의 토사 주문.
(순조실록 3권, 순조 1년 10월 27일 경오 3번째 기사)
<구베아 주교의 편지>
(1797년 8월 15일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이 박해는 교우인 형제가 교우였던 그들의 죽은 어머니의 장례를 외교인 의식으로 지내기를 거절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일어났습니다.
이 형제는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인데, 그들은 양반 가문의 출신으로, 신심이 깊고, 열심하고 또 어머니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임종하면서 그들에게 그의 장례식 때 미신적이거나 우상 숭배적인 것이 결코 허용되는 일이 없도록 당부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죽은 조상들에게 그들의 이름을 쓴 신주를 공식으로 만들어 그것을 단정한 곳에(그래서 그것을 사당이라고 함) 아주 경건하게 모셔야 하고, 또 그 앞에서 모든 후손들은 연중 정한 시기에 제물을 바치고, 향을 피우며, 준비한 음식을 바치고, 또 그 밖의 여러 가지 미신 행위를 하도록 법으로 정해진 관습이 있는데, 죽은 조상들에 대한 조선인들의 효성은 주로 이런 것을 행하는데 있습니다.
(중략)
그러나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조상의 신주를 세우거나 보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즉시 집에 있던 조상들의 신주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중략)
형장에 이르자 사형 집행관이 “국왕에게 복종하고, 조상들의 신주를 모시고, 외국 종교를 포기하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두 형제가 부정적으로 대답하자 집행관은 나라의 관례에 따라 윤 바오로에게 임금이 인준한 그리고 목판으로 쓰인 사형 선고문을 낭독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윤 바오로는 그 목판을 들고, 자신과 형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문을 큰 소리로, 또 기쁘게 읽고서는 사형수들의 머리를 자르게 되어있는 큰 도마 위에 머리를 놓았습니다.
다음 아주 침착하게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여러 번 부른 다음, 형을 집행하도록 희광이에게 신호를 하였습니다. 희광이는 윤 바오로의 머리를 자르고,
이어 즉시 반죽음이 되어 있으면서도 아직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권 야고보를 끌어내어 그의 머리를 잘랐습니다. 이 일은 1791년 12월 7일 오후 3시에 일어났습니다. 윤 바오로의 나이는 만 33세였고, 권 야보고는 만 41세였습니다.
(중략)
9일째 되던 날, 임금으로부터 친척들에게 시체를 매장할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장례식에 온 순교자들의 친척과 친지들은 두 시체가 마치 그 날 살해된 것처럼 붉고 부드럽고 부패의 흔적이 조금도 없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또한 순교자들의 목을 자른 도마에 피가 흐르고 있고, 또 사형 선고문이 쓰여졌던 목판에, 마치 그 날 그 순간에 피가 육체에서 흘러 나온 것처럼 피가 흐르고 있던 것을 보고는 더욱 놀랐습니다.
이런 사실을 12월이면 으레 춥고, 또 그 때는 추위가 심해서 조선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모든 액체, 심지어 집안에 있는 액체까지도 얼기 때문에 더욱 놀랍게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외교인들은 경탄한 나머지 재판관의 불의함과 두 형제의 결백함을 선언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그 기적을 보고, 깊이 생각한 후 신앙에 귀의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에 못지 않게 교우들도 놀라, 기쁨에 넘쳐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천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교우들은 두 순교자의 피에 많은 수건을 적시어 가졌고,
그 중 몇 장은 순교에 관한 자세한 보고와 함께 본인에게도 보냈는데, 여기서 그 순교의 이야기를 장황하지 않게 요약해서 적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 중에서 교우들은 의사가 단념하고 다 죽게 된 어떤 사람이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목판을 담갔던 물을 마시고 즉시 나았다는 말을 하였고,
또 거의 죽게 된 사람들이 순교자들의 피에 적신 수건을 만지고 나았다는 이야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많은 사람들의 허약한 믿음을 굳세게 해 주었고, 또한 적지 않은 외교인들은 신앙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두 순교자의 피는 교우들의 씨앗이 되었다고 당연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집>
“종교 활동은 별로 오래 자유를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조선에 천주교가 소개된 지 7년 후, 즉 1791년에 조선 왕국의 조정 대신 중 벽파가 시파를 반대하여 들고 일어났습니다. 벽파의 반대파를 시파라 불렀는데, 시파에 의하여 천주교가 조선에 도입되었습니다. 그래서 벽파는 시파에 대한 모든 원한을 천주교인들에게 쏟았습니다. 그들은 천주교라는 이름을 말살하기 위하여 왕의 허가를 받아 박해를 일으켰습니다. 왕은 마지못해 억지로 허가하였습니다. 첫 번째 전국적 박해(신해박해)였습니다. 이 박해에서 탁월한 학자인 윤지충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용맹하게 투쟁하다가 가톨릭교의 신앙을 위하여 거룩한 피를 흘려 순교하였습니다. 이분이 바로 조선의 첫 번째 순교자입니다.”
<추안급국안>
추안급국안은 조선 후기 의금부에서 주관한 재판기록으로, 1601년(선조34)부터 1892년(고종29)까지 약 300년 동안 발생한 279건의 범죄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이 추안급국안은 필사본 331책으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추안급국안 74권, 역주집 239~304쪽에는 유항검 · 유관검 · 윤지헌 ·이우집 · 김유산 등의 심문 기록 및 판결문 기록이 자세히 나온다. 이때 윤지충과 권상연의 관련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사학징의 2권 유관검의 공초록 233쪽>
내(유관검)가 이존창과 함께 계동 최인길의 집으로 가서 주문모 신부를 뵙고 곧 고향으로 맞아들였다. 마침 가는 길에 윤지충 · 권상연의 무덤가를 지나게 된 까닭에 내가 주문모 신부에게 말했다.
“이는 우리나라 천주교 중에 고명한 사람의 무덤입니다.”
그러자 주문모 신부가, “성교 공부가 만약 성인품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천주당을 그 사람의 무덤 위에 세우고, 훗날 동방성교가 크게 행해지면 곧 이 두 사람의 무덤은 마땅히 천주당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유관검 심문 기록 (1801년 3월 28일) - 주문모 신부를 만났다는 기록 (유관검이 말하길) “을묘년(1795)에 서양인 주문모가 우리나라에 나와서 신부라 칭하고 여러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들었는데, 그가 서울에서 이존창의 집으로 내려왔다가 제가 있는 곳으로 옮겨와 6~7일간을 머물렀습니다.”(78쪽)
윤지충 무덤 관련 기록
(심문관이 말하길) “너의 신부는 어떤 흉악한 놈이기에 반드시 숨겨두어야 하는가.
너도 우리 동방의 신하된 자인데 어찌 감히 이런 말을 마음에서 싹트게 하여 입에서 발설하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느냐.
‘임금이나 어버이의 명은 오히려 어길 만하다’와 ‘윤지충의 무덤 위에 천주당을 짓는다’는 등의 말은 더욱 지극히 흉악하니….”(87쪽)
(유관검이 말하길) “윤지충의 무덤 위에 천주당을 세운다는 일은 과연 근거가 있으니,
서양인은 반드시 이 천주학 때문에 죽은 사람의 시체는 천주당 안에 장사 지내는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82쪽)
윤지헌 심문기록 (1801년 3월 28일)- 주문모 신부를 만났다는 기록
(윤지헌이 말하길) “주문모는 과연 을묘(1795)년간에 유항검의 집에서 만나보았으며, 세례를 받고 사호(邪號)를 얻었습니다.”(90쪽)
이우집 심문 기록 (1801년 3월 28일)- 윤지충 무덤 관련 기록
“유관검은 (이우집에게) 또한 말하기를, “천주당은 윤지충의 무덤 위에 세월질 것이다.”고 했습니다.(84쪽)
최양업 신부님의 편지 19통 가운데 11신
하루는 ‘진밭뜰’이라는 동네로 갔는데 동네 전체가 얼마 전부터 교리를 배우고 준비 중이었으며 영세 예비를 다 마치고 신부 오기만을 열렬히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몇 명에게 고해성사를 준 후 유아세레를 주었고, 다음 날에는 대인 15명에게 영세를 주기 시작하였으며 날이 새기 전에 미사를 지내려 하는데 홀연 외교인들의 한무리가 나타나 제의와 성물을 훔칠 목적으로 침입하려 하였습니다.
나는 교우들의 도움으로 빨리 성물들을 감추었고, 옆문으로 몰래 빠져나와 캄캄한 밤을 이용하여 산속으로 도망하였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이런 죄악을 범할 수 없습니다”
강도들은 아무것도 강탈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생각하고 관가에 고발하였습니다.
군수가 교우 다섯 명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들 중 하나가 바오로라는 사람입니다. 바오로는 영세한 이래 매우 열심하고 덕망이 높아 진밭뜰 공소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또 하나는 하 아오스팅인데 군수의 보좌로 군수 다음 가는 지위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한테 세례를 받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는데 이때 강도가 습격했던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은 관가에 잡혀가서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이 세상이 임금을 욕하여도 죄악이 되거늘 하물며 하늘의 임금이신 조물주께 욕을 한다는 것은 천상천하에 용납못할 극악 대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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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출신지 | 이주한 곳 | 순교지 | 순교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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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충 바오로 | 진상 장구동 | 전주 남문밖 | 1791년 | |
권상연 야고보 | 진산 | 전주 남문밖 | 1791년 | |
운지헌 프란치스코 | 진산 | 고산 저구리 | 전주 남문밖 | 1801년 |
원씨 | 금산 솔티 | 전주 | 1801년 | |
김토마스(풍헌) | 청양 | 금산, 고산 | 진안에서 병사 | 1801년 |
이씨(이여삼의 형) | 홍주 배올 | 금산 개직이 | 유배 중 사망 | 1804년 |
이여삼 바오로 | 홍주 배올 | 금산 개직이 | 홍주 | 1812년 |
장대원 마티아 | 결성 덕머리 | 금산 솔티 | 공주 | 1813년 |
강씨 | 금산 | 압송 중 자살 | 1827년 | |
오종례 야고보 | 은진 | 진산 | 전주 | 1839년 |
임베드로 | 남포 | 진산 | 전주 옥 | 1839년 |
이소사 막달레나 | 금산 | 전주 | 1840년 | |
김영오 아오스딩 | 홍주 용면 불무동 | 진산 가새벌 | 공주 | 1866년 |
김영삼 | 연산 | 진산 가새벌 | 전주 | 1866년 |
김 베드로 | 진산 | 연산 상사바위 | 공주 | 1866년 |
최덕겸 | 진산 | 공주 도간리 | 공주 | 1866년 |
김공우 | 진산 | 공주 | 1866년 | |
이 바오로 | 전주 노른이 | 진산 진밭들 | 공주 | 1867년 |
최 첨지 | 진산 | 공주 국실 | 공주 | 1867년 |
전춘서 안드레아 | 금산 | 남포 간재 | 서울 | 1867년 |
전루시아 | 진산 | 여산 | 1867년 | |
이택경의 아들 | 진산 오항동 | 전주 옥 | 1867년 | |
손막달레나 | 손막달레나 | 금산 개직이 | 여산 | 1868년 |
한성열 요한 | 금산 개직이 | 여산 | 1868년 | |
박운겸 | 금산 동리 | 여산 | 1868년 | |
김윤문 | 금산 동리 | 여산 | 1868년 | |
송루시아 | 진산 | 사약으로 살해 | 1868년 | |
전성백 야고보 | 금산 개직이 | 공주 산유리 | 공주 | 1868년 |
현프란치스코 | 진산 문바위 | 공주 금동리 | 공주 | 1868년 |
장아나스타시아 | 진산 | 공주 | 1868년 | |
박베드로 | 진산 | 고산 넓은바위 | 여산 | 1868년 |
김 사도 요한 | 연산 | 진산 가새벌 | 서울 | 1877년 |
김춘삼 사도 요한 | 진산 가새벌 | 서울 | 1878년 | |
김 요한 | 진산 가새벌 | 공주 | 1878년 | |
장정선 | 진산 | 연산 동면 오리올 | 서울 | 1880년 |
1886년 조불조약 이후 선교사들의 활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진산 지방리에 가사벌 공소가 세워졌다. 1927년 가사벌 공소의 이의규 회장이 현재의 진산성지가 있는 땅을 기증하였고, 그곳으로 공소를 옮겨 성당을 건립하였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한 2014년 8월 16일 바오로 윤지충과 야고보 권상연을 복자품에 올렸고, 대전교구 천주교 유지재단에서는 기존의 가사벌 공소를 진산성지로 승격하였다. 천주교 진산성지성당은 그 역사성과 건축적인 희소성이 인정되어 현재 등록문화재 제682호로 등록되어 있다.
진산성당의 옛 모습
진산성당의 현재 모습
성당 봉헌 예식서
유해 인수 확인서
윤지충 바오로
유해 증명서
권상연 야고보
유해 증명서
윤지헌 프란치스코
유해 증명서